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이문열 평역 삼국지 (문단 편집) === 내용 오류 문제 === ##--이 목록은 웬만하면 근거없이 수정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가장 큰 문제는 기본적인 사실조차 잘못 표기하는 오류를 범했다는 점이다. 그나마도 적은 제갈량 사후 부분을 더 줄이면서 제갈량의 사망 연도를 232년, 서진의 천하통일을 282년이라고 했는데 각각 234년, 280년이 맞다. 이 오류는 2020년에 판권이 민음사에서 알에이치코리아로 넘어간 뒤에도 전혀 수정되지 않았다. 소설 사이사이에 붙여둔 작가의 독자적인 해설은 대체로 자료가 없던 시절에 작가가 통박으로 때려맞춘 것이 대부분이므로 별로 신뢰하지 않는 것이 좋다. [[정사 삼국지]]에 대해 언급한 부분은 당시 정사 번역이 제대로 된 것이 없어서인지 지금 보면 오류가 수두룩하다. 당시 중국과 수교상태가 아니었기 때문에, 대만에 가서 각 판본을 섭렵하는등 자료를 찾아본 것은 물론 합리적인 일이다. 그러나 각 판본의 차이는 나관중 원저의 마이너 체인지에 불과하므로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다. (이문열 자신도 그렇게 말한다.) 그가 가끔 인용하는 정사 삼국지는 전문 연구자도 읽는 게 어렵기 짝이 없는 물건인 데다가 중어중문학을 전공하지 않은 인기 작가인 이문열이 꼼꼼히 찾아볼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기 때문에, [[수박 겉핥기]] 식으로 읽은 것이 아닌가 하고 의심해 볼 만하다. 현대에 쓰인 2차 연구의 경우는 일본어 자료라면 집필에 도움이 될 수도 있었겠지만, 이문열이 현대 중국어로 쓰인 대만 측 2차 자료의 해독이 가능한지는 의문이기 때문에, 이문열의 대만행은 그다지 도움이 안 되었을 것이라고 보는게 타당하다. "노력했다" 정도. 나관중의 연의 원문인 백화문은 한문과 중국어를 둘다 공부한 사람은 어렵지 않게 읽을 수 있다. 그러나 당시로서는 정사 삼국지는 문장의 난이도는 그렇다 치더라도 일단 연의와 기사를 대조하는 것 자체가 매우 힘들었다. 요즘처럼 간편하게 시간이나 표제어로 원문을 검색해 볼 수 있던 시절이 아니다. 후반부에 가면 작가의 무성의가 두드러지는데, [[허유]]를 죽인 게 [[허저]]가 아니라 [[장료]]라고 하지 않나, 나이가 더 많은 [[장포]]가 [[관흥]]에게 형이라고 하지 않나.[* 이 두 장면은 모두 [[이희재]]의 만화 판과 수정 이후 바르게 고쳐진다.][* 이런 무성의함은 평역 수호지 10권에 수호후전 줄거리를 요약하면서도 반복된다.] 제환공과 진문공을 혼동하기도 한다. 또한 마초가 조조를 급습했을 때 허저가 안장을 들어 화살을 막는 장면을 묘사하면서 정사에서는 허저가 아닌 장합이라고 써놓았는데 정사에서도 허저가 맞는다. 그리고 관구검과 무구검 두 가지 표기가 다 나오지 않나... 후반부를 보다보면 초반부를 쓴 작가 본인이 썼는지조차 의심스러울 정도로 오류투성이다. 그중에서도 가장 황당한 부분은 관우와 제갈량의 관계를 표현한 부분인데 6권 적벽대전 이후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놓아준 일은 정사에 나오지 않으므로 이것으로 둘의 관계가 나쁘다는 식으로 해석하는 것은 억지다라고 평해놓고 8권에서 관우가 사망하는 장면에서 화용도 사건 이후 유비 군영의 2인자였던 관우와 제갈량의 상하관계가 뒤집혔고 이로 인해 감정에 응어리가 생겼다라고 스스로 억지라고 말한 주장을 번복했다. 소설로서의 삼국지연의와 정사로서의 삼국지를 헷갈리고 무리한 비약을 해놓은 경우도 있다. 가령 서서가 유비의 참모로 들어와 조인의 팔문금쇄진을 격파하는 장면을 고대의 전투가 개인과 개인의 싸움에서 병력과 병력의 전법 싸움으로 도약하는 큰 의의가 있는 장면이라고 서술한 부분이 있다. 그러나 이미 삼국지 시절에 고대 전투의 병법은 완성된지 오래고[* 연의 작중에도 나오는 [[손자병법]]이 언제 나온 병서인지 알아보자.] 연의에서 개인과 개인이 접전을 벌이는 장면은 단지 군담소설의 재미를 위해 추가된 창작일 뿐이다. 팔문금쇄진이나 일기토나 다 창작의 영역에서 비롯된 내용일 뿐인데 이를 이용해 고대의 전투에 대해 논하는 것은 지나친 비약이다. 뿐만 아니라 유비가 배신의 명수임을 말하면서 [[여포]]와 비교하는 서술을 하기도 하는데[* 사실 현대에 들어와서 "유비는 여러 군웅들의 휘하에 지냈던 적이 많으니 여포보다도 더 심하게 배신을 밥먹듯이 했다." 이런 식으로 유비를 까는 언론은 자주 보인다. 이미 연의 원작에서 [[채모]]도 비슷한 발언이 있기도 했고.] 유비는 유장을 팽한 것을 제외하곤 딱히 배신이라고 할 수 있는 행동을 한 적은 없는 데다, 여포는 [[정원]], [[동탁]]을 연달아 죽이고 몰래 유비의 세력을 송두리째 뺏는 등 확실한 배신의 모습을 보인다는 점에서 무리한 비교라고 할 수 있다.[* 다만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문열의 해석이 "무리한 비교라고 할 수 있다"기 보다는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가질 여지가 있다. 실제로 유비는 생각보다 다른 주군의 객장 신세를 자주 진 편이다. 초기에 공손찬에게 의탁했었고, 여포에게 서주성을 넘기고 자신은 소패로 간 적이 있으며, 여포와의 다툼에서 지자 조조에게 가서 신하가 되었다. 조조 품을 떠나 차주를 죽이고 기주의 원소에게 갔으며, 원소가 유표에게 보내자 유표에게 의탁하여 신야와 강하 수비를 맡았었다. 의탁이라고 하기에는 애매한 유장을 포함하지 않더라도 다섯 명의 주군을 모셨다가 버렸다고 오해받기 좋은 셈인데, 현대인들에게 주인을 다섯 번 바꾼 정치인이라고 하면 누구라도 철새 정치인을 떠올릴 것이다. 신하와 객장은 엄연히 입지 자체가 다르지만, 어쨌든 유비가 여러 군주를 거치며 신세를 자주 졌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객관적이고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유비는 간웅 이미지를 가지고 있었던 조조와 자신을 차별화시키기 위해 일평생을 군자로서 행세하였고 자신의 이상인 한실 부흥을 위해 피나는 노력을 해왔다. 한나라 경제의 후손이라고 했지만 한나라 경제만큼 후사가 많은 황제도 드물고(아들만 120명이었다) 어찌보면 유비는 황제와는 팔촌도 훨씬 넘는 그냥 족보상의 아저씨일 뿐인데, 그 '족보상의 아저씨'임을 지키고 실현하기 위해 자기 평생과 촉나라를 거의 다 바쳤다고 해도 과언은 아니다. 정리하자면 그가 진짜 군자인지 사이비인지는 알 수 없거나 애매하다. 그러나 유비는 객장 신세라도 필요할 때는 주저없이 받아들였고 그런데도 백성들이나 자기를 따르는 신하들에게 최선을 다한, 현실적인 이상주의자로 볼 수 있다. --컨셉질도 평생을 하면 인정해 줘야지-- 이런 의견은 이중톈이나 최근의 다른 소설 매체에서 여러 번 등장한 바 있다.][* 다만 앞 서술에서 유비의 행보에 대해 서술한 부분은 재고할 필요가 있는데 신세를 진 것과는 별개로 처음부터 유비가 신하로 들어가 주인으로 섬겼던 군주는 없다. 기반이 없어서 이리저리 방랑했지만 어디까지나 자기 세력을 가진 한 명의 군벌이었고 다른 군벌들에게 아랫사람 취급받더라도 어디까지나 객장이었지 그 사람들을 신하로서 보필한 게 아니다. 이와 비슷했던 게 이통과 장패, 이들은 결국 조조의 세력권으로 들어가지만 유비는 이를 거부했던 것이다. 사실 중요한 건 유비가 세력에서 이탈할 만한 명분의 여부인데 공손찬의 경우 명망높던 황족 유우를 살해해서 스스로 명분을 버렸고(유비 뿐 아니라 조운도 이 시점에서 공손찬을 버렸다. 연의에서는 크게 다루지 않는 사건이지만 실제로는 엄청난 파장을 갖고 온 사건이다.) 여포는 받아줬더니 배신하고 유비의 뒤통수를 쳤다. 조조의 경우 헌제의 밀명도 밀명이나 조조가 유비의 최측근인 장비를 인척으로 포섭하거나 유비의 지지자인 미축에게 따로 벼슬을 줘서 자기 라인으로 삼으려 하는 등 오히려 배신은 조조가 먼저 시도한데다 조조 세력 내부에서 유비를 죽이자는 참언이 꾸준히 나왔기에 유비 역시 이런 분위기를 파악하고 더 늦기 전에 도망쳐 서주에서 다시 세력을 갖추려다가 조조가 기민하게 공격을 해버려 의거에 실패하는 바람에 원소에게 간 것이다. 또한 원소는 유비를 충분히 도울 수 있었으며, 실제로 지원군을 보내주기는 했으나 우금이 별다른 어려움 없이 독자적으로 정리할 수준에 불과한 미미한 지원이라 유비에게는 실질적으로 도움이 된 것도 아니니 사실상 생색내기였을 뿐으로 결국 유비가 박살나 도망쳐오자 자기의 프로파간다에 이용하였다. 만약 유비가 서주에서 죽었다면 순교자로 포장해 자기가 유리하게 이용해먹었을 인물이 원소다. 이후 유표에게 간 것도 배신은 아니며(유표와 원소는 동맹이다.) 오히려 유비가 명분을 바치고 팽당한 것에 가깝다. 유표도 먼저 유비를 견제했음에도 끝까지 배신하지 않았고 유표가 죽은 뒤에야 독립적으로 행동했다. 유비가 유일하게 명분에서 처지는 건 촉의 유장인데 이것도 사실 유장의 부하들이 그 땅을 유비에게 먼저 갖다바친 것이므로 명분이 없다고 할 수 만은 없다. 즉, 실제로는 유비가 배신했다는 말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위의 대표적인 사례 외에도 원소와 반목하고 원술의 통수를 여러 번 쳤고[* 원술과의 동맹이 이래저래 타당성에서 문제가 제기되긴 하지만 그럴거면 아예 처음부터 승낙하지 않는게 옳았다. 여포는 원술에게서 단물만 빨아먹고 약속은 하나도 지키지 않아서 문제. --원술의 꿀물은 여포가 전부 빨아먹었나 보다--] 장양의 휘하에서도 원소가 편지를 보내자 스스로 의심하여 도망쳤다.[* 훗날 장양이 여포를 구하려 하다가 부하 양추한테 살해당한 걸 생각하면 장양은 여포에 대해 나쁜 마음이 없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또한 서량 전쟁의 결과를 서술하면서 [[마등]]을 드는데 마등이 조조에게 살해되었다는 건 정사에 없다고 서술하고 중앙에 입조하여 편하게 일생을 보낸 것처럼 이야기했는데, 이건 사실과 다르며 마등 일가는 죽은 시기가 서량전쟁 이후로 서술되어있을 뿐이지 정사에서도 조조에게 참살당하며 생을 마감했다. 조조가 마등 일가를 멸족한 것은 후한서 헌제기 등 다른 정사에서도 나온다. 만화판에서는 개정하여 마대 빼고 다 죽은 걸로 수정되었다. 조운에 대한 나이 설정도 문제다. 처음 등장할 때 소년장수라고 표현했으면서[* 당시가 191~192년으로 유비의 나이가 30이 넘었다.] 제갈량의 북벌 때 70이 넘은 유비보다도 나이가 많은 인물로 나온다. 단 이는 이문열 삼국지에만 있는 내용이 아니라 중국 원서에도 나오는 오류이므로 이문열 삼국지만의 문제는 아니다. 관우의 수술 장면 또한 오류가 있다. 이문열은 관우전은 물론 화타전에도 수술을 한 기록은 없다고 당당하게 말했지만, 화타가 집도의가 아니었고 바둑을 둔 게 아니라 담소를 나누었다 정도의 차이점만이 있을 뿐 어깨를 수술한 기록 자체는 관우전에 떡하니 나와있다. 그것도 배송지가 추가한 배주가 아니라 진수가 쓴 본전에 당당하게 기록되어 있다. 여하튼 이 이문열판 삼국지의 많은 오류들로 인해, 보다 못한 삼국지 마니아 중 하나인 [[본삼국지]]의 저자 [[리동혁]]이 이런 오류들을 까는 [[삼국지가 울고있네]]란 책을 쓰기도 했다. 아마 이 여러 문제점은 처음 집필했을 때와는 달리 이문열 본인이 나이가 들어서(또는 그 이유 때문에 별 개의치 않아서)일 가능성이 높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